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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단우의 광주이야기- 박준 [전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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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
댓글 0건 조회 3,520회 작성일 18-01-15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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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기사는 2017년 말경 서상우 단우(화순전남대병원 홍보실장)가 사무처장인 장금순 단우에게 카톡으로 제공한것을 참고로 전남일보를 검색하여 찾아서 올린 글이다. 노성태 단우(국제고 역사교사)는 전남일보에 오피니언 칼럼, 기획특집, 문화, 광주이야기 등 많은 글을 기고하고 있다.>


"내 평생 소원 1만 인재 양성" 그는 광주의 안창호
노성태의 광주 역사 문화 기행
(38) 청년의 큰 스승, 청년의 영원한 벗 소민 박준
전남일보 입력시간 : 2013. 10.03. 00:00


지난 2013년 5월,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흥사단이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이날 100주년을 맞아 거행된 기념식에 흥사단 단우는 물론 국무총리를 비롯한 여야 대표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직접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전ㆍ현직 대통령의 축하메시지도 낭독됐다.

이처럼 전ㆍ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흥사단 행사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흥사단이라는 시민단체가 100주년을 이어왔다는 역사도 대단해서지만 지난 100년을 통해 보여준 한국사회에서의 역할 때문이었다. 흥사단이 배출한 독립유공자 112명이 단적인 예다.

창립 50주년을 맞아 시작한 학생 아카데미 운동을 통해 배출된 10만의 인재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민주화와 산업화, 성숙한 시민사회를 이루는데 기여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민족을 위한 100년'을 정리하고 '세계를 위한 100년'을 준비하는 행사에 참석해 축하한 이유다.

흥사단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1963년에 시작된 아카데미 운동이었다. 당시 흥사단의 핵심 멤버 주요한은 흥사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청소년에게 도산 사상을 전파해 젊은 단우를 규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중책을 숭실대 안병욱 교수에게 맡겼다.

흥사단 광주학생 아카데미는 첫 행사로 '안병욱 교수 초청 학생ㆍ시민 교양 강좌'를 열었다. 안병욱은 1965년 11월 광주행 야간열차를 탔다. 다음날 새벽 4시, 광주역 플랫폼에서 흥사단 깃발을 들고 서 있던 27세의 젊은 청년 박준을 만난다.

그날 안병욱은 광주일고 운동장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맑고 뜨거운 젊은 혼들에게 도산의 애국정신과 주인정신을 외친다. 이날 안병욱의 외침은 도산 정신이 남도 땅에 뿌려진 또 하나의 씨앗이 된다. 이 강연을 계기로 광주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은 힘찬 첫 출발을 내디딘다.

그 다음은 청년 박준의 몫이었다. 1965년 서석 기러기회가 창립되고 그가 서거하던 2001년까지, 그는 36년의 삶을 광주ㆍ전남 흥사단과 함께 한다. 동성고 교사 시절에도, 교장이 돼서도 그의 하루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오후 6시 출근, 10시 퇴근은 흥사단 사무실(단소)의 출ㆍ퇴근 시간이었다.

 <그림1중앙>그가 흥사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군 시절(1961~1963) 같은 내무반에 근무하던 오정수 동지로부터였다. 그는 도산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몸소 실천하던 오정수의 생활 태도에 큰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안도산전서'를 읽으며 지역사회에서 한 알의 씨앗이기를 자처한다. 군 제대 후 주요한 등 기라성 같은 흥사단 단우들의 격려를 받는다.

흥사단에 입단한 그는 광주일고 태권도 사범이 된 후 본격적으로 후배, 제자들을 동지로 규합한다. 그렇게 동지를 모은 후 1965년 9월19일 전남대 농과대학에서 '서석기러기회'를 창립한다. 한 달 뒤인 10월17일 광주일고 강당에서 17명의 회원으로 '광주학생아카데미'창립 총회를 갖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힘차게 외친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단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질서 속에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실천하는 단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무를 말할 때 줄기와 가지와 잎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줄기와 가지와 잎은 아니요 분명히 뿌리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뿌리, 힘 있는 뿌리, 제 구실을 다하는 뿌리가 됩시다. 저는 도산의 사상과 흥사단의 이념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이를 실천궁행하는 것이 곧 민족 부흥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고 '광주학생아카데미'를 창립하는 것입니다."

박준은 광주에 흥사단 깃발을 꽂으면서 세 가지 목표를 세운다. 첫째 흥사단 학생 아카데미를 광주 지역 학생 운동의 지휘본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고, 둘째 1만의 인재를 배출, 지역사회는 물론 온 나라의 큰 일꾼으로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흥민신협을 통한 사회운동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박준은 전 삶을 광주ㆍ전남의 흥사단에 바친다.

박준 자신이 1번이 되어 시작된 광주 흥사단 아카데미 회원은 5000여 명의 인재가 됐고 그의 지도하에 만들어진 학생 조직은 40개가 넘었다. 5000의 인재는 이후 사회 곳곳에서 나라의 큰 동량이 된다.

그가 회갑을 맞자 제자들은 600쪽 가까운 '청년의 영원한 벗'이라는 회갑 기념문집을 헌정한다. 광주ㆍ전남 흥사단에 바친 정열, 흥사단을 거쳐 간 5000여 제자들에게 쏟은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감사의 보은이었다.

전남대 아카데미 지도교수로 평생을 함께 한 김용선 교수는 회갑 기념문집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고운 꽃다발'로 표현하면서 "우리 고장뿐 아닌 한국을 대표할 만한 지도자"로 그를 평가했다.

 <그림2왼쪽>광주 흥사단 아카데미와 깊은 인연을 맺은 안병욱은 박준과의 만남을 '깊은 만남, 행복한 만남, 창조적인 만남'으로 규정했다. 두 분의 평가만으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기에 부족하다. 그를 존경하고 따랐던 수많은 제자들은 그를 '큰 바위 얼굴'로 '제 2의 안창호'로 '가장 행복한 남자'로 규정한다.

전 생애를 광주ㆍ전남 흥사단에 바친 소민(素民) 박준(朴埈ㆍ1938~2001), 그의 이름처럼 가파르게 산 그의 생애가 궁금하다. 그는 1938년 전남 곡성군 오산면에서 부친 박하연과 모친 정수남 사이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1938년은 그의 평생 멘토였던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서거년이기도 했다. 따라서 소민의 나이는 곧 도산의 서거 몇 주년이 된다.

오산초등 시절 6ㆍ25동란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광주 중앙초등, 서중ㆍ일고를 거쳐 전남대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다(1965). 광주제일고등학교 태권도 사범(1963), 서석기러기회 창립(1965), 광주상고 교사(1966ㆍ현 동성고), 흥사단 광주분회 창립(1969), 흥사단 광주학생아카데미 전라남도 연맹 창립(1971), 흥민회 창립(1976, 회장), 흥민신용협동조합 창립(1976ㆍ이사장), 흥사단 전라남도 지부 창립(1980ㆍ지부장), 광주흥사단 창립(1987ㆍ이사장), 광주흥사단 아카데미 지도위원장(1993), 광주흥사단 신용협동조합 이사장(1994), 동성중 교장(1999) 등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압축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는 1만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평생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2001년 지병으로 세상을 뜬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우리 사회의 씨앗이고자 자처했던 제 2의 안창호로 불린 소민 박준, 그는 청년의 큰 스승, 청년의 영원한 벗이었다.

                                                                                        노성태 빛고을역사교사모임 회장ㆍ국제고 교사



사진1: 청년박준
사진2: 박준이 제자들과 무등산 등반길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진3: 박준의 회갑 때 제자들이 헌정한 기념문집. 김용선 교수는 이 문집을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고운 꽃다발"이라면서 "우리 고장뿐 아닌 한국을 대표할 만한 지도자"로 박준을 평가했다.
사진4: 서상우 단우가 보낸 전남일보 기사 사진
사진5: 서상우 단우가 보낸 전남일보 기사 사진(흥사단창립100주년기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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