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를 다시 불러야 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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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위한 행진곡
노래에도 유통기한 비슷한 게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보다가 문득 노래에는 '노래의 생명'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떤 노래를 강제로 못부르게 한다면 그 노래는 더 이상 공개 된 장소에서 잠시나마 자취를 감춰야 한다. 그렇다고 그 노래의 생명이 없어질 수 있는가,
아무리 좋은 노래도 점차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희미한 추억속으로 살아지다가도 어느 순간 그 노래를 추억하는 사람들로부터 가끔 다시 불리어 지곤 하다가 궁극에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도 다할 것이다.
윤상원, 같은 학과 6년선배다. 친구와 함께 어느 날 들렀던 녹두서점(김상윤)의
골방에서 예비역 선배로 마주 앉았다.
차분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학창,삶,인생을 나누었다.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론없는 대화,
그리고 얼마쯤 지나서 나는 입대를 했다.
휴가나와 보니 친구 임낙평이 강학(야학선생)으로 있는 광천동 '들불야학'의 또 다른 박기순강학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같은 학번이었으니 교양과목을 같이했을 사범대 여학생이었다.
다시 귀대를 했고, 79년 10월 26일 아침, 보초를 교대하다가 칠흑같이 어둡고 암울했던 유신독재가 걷히는 순간을 맞았다.
박정희가 죽고 나자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시민학생의 민주화 시위가 근자의 북아프리카 '재스민혁명'처럼 전국적으로 연일 이어졌다.
늑대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다더니, 사태수습을 위한다던 전두환 일당이 배운 게 총질이라 멀쩡한 나라에 전국적 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핏빛 5월을 맞게 된다. 많이 죽었다.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
인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자유, 정의를 이루자는 요구에 총을 들이댄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딴 건 필요치가 않다는 것이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들불야학의 지도강학으로서 쇠외되고 억눌리고 부모나 사회의 보살핌이 없던 근로청소년들을 모아서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던 그는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시민군대변인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산화하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중략)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죽어 나간 폭도들에게 장례라도 제대로 치룰 수 있을 수 있었을까,
찬바람 부는 그해 12월, 살아남은 자 감옥에 있고, 이승에 없는 젊은 운동가 두 사람을 영혼으로 묶어내는데 백기완의 시에서 황석영이 작사를 하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렇게 세상의 바닥을 열었다.
이 노래가 싫다. 이 노래는 벌써 10여년 전에 이미 식상해 있었고, 일종의 선민의식까지 담고 있는 노래가사는 더 이상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을 대변하는데 한계점이 온 듯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 노래를 국가기념일에 부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3년동안 공식석상에서 부르질 못했다. 그런가하면 보수단체가 UN산하 유네스코에 ' 5.18은 북한군 600명이 투입된 대남책동이었다' 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북이 군사합동작전을 해서 수천의 민간인에게 사상을 입혔다는 해괴한 논리가 되는데,
스스로 부르기 싫어지는 노래, 더 이상 불러야 할 이유가 없어지려는 이 노래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이 세태가 개탄스럽다.
노래에도 유통기한 비슷한 게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보다가 문득 노래에는 '노래의 생명'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어떤 노래를 강제로 못부르게 한다면 그 노래는 더 이상 공개 된 장소에서 잠시나마 자취를 감춰야 한다. 그렇다고 그 노래의 생명이 없어질 수 있는가,
아무리 좋은 노래도 점차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희미한 추억속으로 살아지다가도 어느 순간 그 노래를 추억하는 사람들로부터 가끔 다시 불리어 지곤 하다가 궁극에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생명도 다할 것이다.
윤상원, 같은 학과 6년선배다. 친구와 함께 어느 날 들렀던 녹두서점(김상윤)의
골방에서 예비역 선배로 마주 앉았다.
차분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학창,삶,인생을 나누었다.
밤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결론없는 대화,
그리고 얼마쯤 지나서 나는 입대를 했다.
휴가나와 보니 친구 임낙평이 강학(야학선생)으로 있는 광천동 '들불야학'의 또 다른 박기순강학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같은 학번이었으니 교양과목을 같이했을 사범대 여학생이었다.
다시 귀대를 했고, 79년 10월 26일 아침, 보초를 교대하다가 칠흑같이 어둡고 암울했던 유신독재가 걷히는 순간을 맞았다.
박정희가 죽고 나자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시민학생의 민주화 시위가 근자의 북아프리카 '재스민혁명'처럼 전국적으로 연일 이어졌다.
늑대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다더니, 사태수습을 위한다던 전두환 일당이 배운 게 총질이라 멀쩡한 나라에 전국적 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핏빛 5월을 맞게 된다. 많이 죽었다.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
인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자유, 정의를 이루자는 요구에 총을 들이댄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딴 건 필요치가 않다는 것이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들불야학의 지도강학으로서 쇠외되고 억눌리고 부모나 사회의 보살핌이 없던 근로청소년들을 모아서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던 그는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시민군대변인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산화하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중략)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죽어 나간 폭도들에게 장례라도 제대로 치룰 수 있을 수 있었을까,
찬바람 부는 그해 12월, 살아남은 자 감옥에 있고, 이승에 없는 젊은 운동가 두 사람을 영혼으로 묶어내는데 백기완의 시에서 황석영이 작사를 하고 김종률이 곡을 붙인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렇게 세상의 바닥을 열었다.
이 노래가 싫다. 이 노래는 벌써 10여년 전에 이미 식상해 있었고, 일종의 선민의식까지 담고 있는 노래가사는 더 이상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을 대변하는데 한계점이 온 듯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 노래를 국가기념일에 부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3년동안 공식석상에서 부르질 못했다. 그런가하면 보수단체가 UN산하 유네스코에 ' 5.18은 북한군 600명이 투입된 대남책동이었다' 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남북이 군사합동작전을 해서 수천의 민간인에게 사상을 입혔다는 해괴한 논리가 되는데,
스스로 부르기 싫어지는 노래, 더 이상 불러야 할 이유가 없어지려는 이 노래를 다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이 세태가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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