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없는 오디세우스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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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지가 없는 오디세우스의 여정 >
청소년문화의집 래미학교 길잡이교사 임민정
원래 여행은 영웅을 위한 것이다. 영웅은 반드시 이루거나 극복해야할 무언가를 위해 긴 고난의 여정을 떠나야만 하고, 그 와중에 시련과 배신을 겪으며 혹은 누군가의 조력으로 결국 원하던 것을 얻거나 성취하고 명예롭게 귀환한다. 대개 작품 속의 주인공의 여정은 이런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마친 후 부하들과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서 갖은 난관과 풍파를 겪는다. 그러나 아테나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출국한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집과 가족을 되찾는다.
오디세우스와 주인공은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귀향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경 속에서도, 혹은 마녀 키르케나 요정 칼립소와 지낼 때도, 심지어 칼립소가 그에게 불로불사와 영생을 주겠다고 했음에도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구사상사에서는 인간의 현존을 ‘고향상실’로, 인간의 구원을 ‘고향회귀’로 표현해왔다. 노발리스(Novalis)의 말대로 철학은 본질적으로 ‘향수병’이고, 종교도 인간을 순례자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런 고향회귀는 정신적으로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행해져야하고 귀향을 마친 인간은 고향에서 비로소 자기 동질성을 찾는다.1)
찾아야하는 것이 고향이므로 현실은 실향상태이다. 물론 고향이 변해서 타향이 고향이 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때 원래의 고향은 타향이 된다. 가야하고 추구해야할 고향과, 현실은 고향을 상실한 상태인 실향이라는 이런 생각은 명백한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찾아야 할 고향에 우리는 얼마든지 신∙절대정신∙민족∙국가∙이상향 같은 이름들을 붙일 수 있다.
집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담 속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목적을 성취한 다음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왕위에 오르고 결혼을 하게 되거나 보물을 찾은 후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대충 몇 줄의 설명으로 간단히 보충될 뿐이다. 귀환이 목적이었던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왔으니 더 이상 귀환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인간의 현존이 고향상실인데 고향에 돌아왔으면 더 이상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흥미롭게도 단테의『신곡』지옥 부분에서 26곡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와 비교할 때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지옥 26곡에서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결코 실현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는 ‘귀환’이라는 것 자체를 문제적으로 이해하고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신에 대한 위반의 시발점인 인간 지식의 추구로 보고자 했다.” 2)
사랑스러운 자식도, 늙은 어버이를 생각하는 정도 아내인 페넬로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으로서의 임무도 정도 내 마음속에 있는 격정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알고 싶고 사람의 악과 사람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심정에는. 그래서 나는 대양을 향해 나섰다. ‘(중략) 제군은 제군의 타고난 운명을 생각하라. 제군은 짐승 같은 생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구하고 덕을 따르기 위해 태어났도다.’3)
오디세우스의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은 영웅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비극적이다. 주목할 점은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지옥에 배치하여 인간의 도에 넘은 지식을 추구한 죄를 묻고는 있으나 동시에 그의 내면에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적인 완성과 추구의 열정이라는 ‘위반’에 대한 부러움과 찬미가 내재한다는 것이다.
미지(未知)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것은 곧 미지의 세계를 전제로 하며 이는 지(知)에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낯선 세계로부터 친숙한 세계로 나아간다면,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반대로 친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4)
방랑자-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5)
성취가 여정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동물이고, 진정한 인간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써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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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전광식(1998),「귀향(歸鄕): 그 철학적 의미-서양 정신사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대동철학』제2집, 대동철학회, pp.358-359. 참조.
-2)박상진(2006),「기원의 위반과 문학 과정: 단테의〔지옥〕26곡에 나타난 오디세우스에 대한 연구」,『이탈리아어문학』제25집, 한국이탈리아어문학회, p.120.
- 3)Alighieri Dante,『신곡 I』, 김문해 옮김(1992), 하서, pp.168-169. 참조.
- 4)박상진(2006), 앞의 논문, pp.126-132.
-5) Friedrich Nietzsche,『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김미기 옮김(2010), 책세상,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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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화의집에서는 매주 주간회의 전 직원들이 돌아가며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발표하며 공유하는시간을 갖는다.
그 두번째 시간에 발표된 내용을 단우게시판에 옮겨본다.
청소년문화의집 래미학교 길잡이교사 임민정
원래 여행은 영웅을 위한 것이다. 영웅은 반드시 이루거나 극복해야할 무언가를 위해 긴 고난의 여정을 떠나야만 하고, 그 와중에 시련과 배신을 겪으며 혹은 누군가의 조력으로 결국 원하던 것을 얻거나 성취하고 명예롭게 귀환한다. 대개 작품 속의 주인공의 여정은 이런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마친 후 부하들과 고향 이타카에 돌아가는 여정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서 갖은 난관과 풍파를 겪는다. 그러나 아테나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고 출국한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경쟁자들을 다 물리치고 집과 가족을 되찾는다.
오디세우스와 주인공은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귀향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경 속에서도, 혹은 마녀 키르케나 요정 칼립소와 지낼 때도, 심지어 칼립소가 그에게 불로불사와 영생을 주겠다고 했음에도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구사상사에서는 인간의 현존을 ‘고향상실’로, 인간의 구원을 ‘고향회귀’로 표현해왔다. 노발리스(Novalis)의 말대로 철학은 본질적으로 ‘향수병’이고, 종교도 인간을 순례자로 정의한다. 따라서 이런 고향회귀는 정신적으로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행해져야하고 귀향을 마친 인간은 고향에서 비로소 자기 동질성을 찾는다.1)
찾아야하는 것이 고향이므로 현실은 실향상태이다. 물론 고향이 변해서 타향이 고향이 되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이때 원래의 고향은 타향이 된다. 가야하고 추구해야할 고향과, 현실은 고향을 상실한 상태인 실향이라는 이런 생각은 명백한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찾아야 할 고향에 우리는 얼마든지 신∙절대정신∙민족∙국가∙이상향 같은 이름들을 붙일 수 있다.
집에 돌아온 오디세우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담 속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목적을 성취한 다음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왕위에 오르고 결혼을 하게 되거나 보물을 찾은 후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대충 몇 줄의 설명으로 간단히 보충될 뿐이다. 귀환이 목적이었던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왔으니 더 이상 귀환은 그의 목적이 아니다. 그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인간의 현존이 고향상실인데 고향에 돌아왔으면 더 이상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흥미롭게도 단테의『신곡』지옥 부분에서 26곡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와 비교할 때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지옥 26곡에서 단테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결코 실현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는 ‘귀환’이라는 것 자체를 문제적으로 이해하고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신에 대한 위반의 시발점인 인간 지식의 추구로 보고자 했다.” 2)
사랑스러운 자식도, 늙은 어버이를 생각하는 정도 아내인 페넬로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으로서의 임무도 정도 내 마음속에 있는 격정에는 이길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알고 싶고 사람의 악과 사람의 가치를 알고자 하는 심정에는. 그래서 나는 대양을 향해 나섰다. ‘(중략) 제군은 제군의 타고난 운명을 생각하라. 제군은 짐승 같은 생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구하고 덕을 따르기 위해 태어났도다.’3)
오디세우스의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은 영웅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비극적이다. 주목할 점은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지옥에 배치하여 인간의 도에 넘은 지식을 추구한 죄를 묻고는 있으나 동시에 그의 내면에는 오디세우스의 인간적인 완성과 추구의 열정이라는 ‘위반’에 대한 부러움과 찬미가 내재한다는 것이다.
미지(未知)의 세계를 알고 싶다는 것은 곧 미지의 세계를 전제로 하며 이는 지(知)에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낯선 세계로부터 친숙한 세계로 나아간다면,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반대로 친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4)
방랑자-어느 정도 이성의 자유에 이른 사람은 지상에서는 스스로를 방랑자로 느낄 수밖에 없다-비록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여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목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시하고 그것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보려 할 것이다.5)
성취가 여정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동물이고, 진정한 인간은 결과가 아닌 과정으로써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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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전광식(1998),「귀향(歸鄕): 그 철학적 의미-서양 정신사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대동철학』제2집, 대동철학회, pp.358-359. 참조.
-2)박상진(2006),「기원의 위반과 문학 과정: 단테의〔지옥〕26곡에 나타난 오디세우스에 대한 연구」,『이탈리아어문학』제25집, 한국이탈리아어문학회, p.120.
- 3)Alighieri Dante,『신곡 I』, 김문해 옮김(1992), 하서, pp.168-169. 참조.
- 4)박상진(2006), 앞의 논문, pp.126-132.
-5) Friedrich Nietzsche,『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김미기 옮김(2010), 책세상,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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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화의집에서는 매주 주간회의 전 직원들이 돌아가며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발표하며 공유하는시간을 갖는다.
그 두번째 시간에 발표된 내용을 단우게시판에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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