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과 훈련, 그리고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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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훈련, 그리고 공부
나는 원래 마라톤을 할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마라톤을 해 볼 생각을 안 해 본 사람들에게는 남달리 보일런지는 모르겠으나 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인구 100명중에 5명 정도가 풀마라톤 경험을 가진 것으로, 한국은 1명 정도이다.
그렇게 보면 희귀한 경우이기는 하다. 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다양한 기록과 깊이가 다른 내용들도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번 3월에 7번째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고 올해에만 4차례의 도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럴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뛰면 좋으니까’ 뛴다.
마라톤을 하는 데에 타고난 소질이라는 것이 있다. 무슨 운동이든지 같이 운동을 해 보면 서로가 다르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30%의 소질과 60% 훈련, 10% 기타요인에 의해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고집(?)을 가지고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슴도 간과 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습능력을 키우고 훈련을 거듭하고 공부하려들면 상당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학에 대한 깊이가 없어서 감히 덧붙일 수도 없지만 학습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익힌다.‘ 로 되어 있다. 훈련은 ’어떤 것을 익히기 위해서 되풀이 연습함’이다.
공부는 위의 두 가지를 결합한 형태에 자율적인 요소가 가미된 형태이다.
그래서 공부는 가장 바람직한 표현이자 일반적인 용어이다.
‘공부하라’ 평생 듣기 싫은 낱말 중에 하나다. 함에도 장성수라는 친구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감히 책까지 내다 팔았다.
골프를 치다보면 실력들이 같을 수가 없다. 일란성 쌍둥이가 친다고 하더라도 놓여 진 공의 위치와 골퍼의 신장과 나이와 힘의 배분, 중력과 목표지점의 차이, 바람과 잔디, 클럽의 각도, 헤아리자면 108가지의 요인들이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골프를 시작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 나이 먹고 사회에 나와서 그것도 여건(?)에 따라서 수만 가지의 동기에 의해서 시작을 한다.
배우는 속도도 천차만별이다. 그 속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말을 아낀다. 그게 골프의 매너라고 포장이 되기도 하고 실제가 그렇다.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
세상살이도 그렇지만 한마디로 줄이면,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이다.
바둑에서도 ‘혼자바둑 3년이 스승바둑 6개월을 못 이긴다.‘는 말이 있지만 골프는 바둑과는 또 다르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금기시하기도 하거니와 아랫사람에게서 배운 윗사람은 아주 특별한(?) 분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에 따른 비화도 숱하다.
노무현이 그랬고, 문재인은 노무현 보다도 어쩌면 더 어려운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노무현의 속도를 문재인은 따라가지를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가능성에 기대를 갖게 한다. 노무현은 속도 때문에 ‘설화‘ 가 뒤 따랐지만 문재인는 그런 ’설화‘가 상대적으로 적다.
한 번의 대선으로 시시한 것은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첩첩산중이다. 한마디의 말을 수없이 확대재생산하는 언론들이 있고, 그걸 헤아려 걸러내지 못하는 국민들도 있고, 자기 진지에서도 정말로 호시탐탐하는 세력들이 언제고 할퀴려 은인자중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국민들로 부터는 야당이 박근혜의 실정을 쓸어 담지 못한다고 비난을 받고, 치고 나가려고 하면 자기 진영에서부터 벌떼처럼 갑론을박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한 가지 기대가 되고 희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고, 차마 눈뜨고 사는 세상이 아닌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문재인, 그에게는 할 수 있는 패, 손에 쥔 패가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손에 조그만 패를 하나 들었다. 다른 변수는 하나도 변하지가 않았다. 국민, 여당의 자충수, 그건 남의 패이고 그것까지 이용하려하기에는 너무 섣부르다.
다만 ‘깨어있는 시민‘들이 깨어나서 한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 깨어나서 눈을 뜬 다음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를 몰라서 허둥대다가 헛발질로 자살골을 수도 없이 스스로 먹여야 했던 그들이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공부’ 한 효과가 조금씩 엿보인다는 것이다.
박정희 묘에 참배를 한다. 그 문제 하나로도 이미 적전은 사정없이 분열되고도 남았다. 이완구총리 청문회처리 문제에서도 호응은 아니래도 목소리를 낮추어주는 모습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분명 많이 달라졌다. 실감한다. 문재인이 잘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공부한 시민세력들이 이제야 뭔가를 아는 듯하다. '행동하는 양심'의 때를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다.
잘하는 것이다.
문재인의 조그만 선택들이 당위에 맞지 않는 부분이 분명하지만 감내까지 해주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벌써 봄을 맞을 준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의 고민은 어쩌면 지금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조용함이 오히려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조용히 깃발을 내리고 있는 지금도 언제든지 함께할 그 날이 분명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용하기만 한 ‘희망의 분수’를 마음속에서 뿜어 본다.
나는 원래 마라톤을 할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마라톤을 해 볼 생각을 안 해 본 사람들에게는 남달리 보일런지는 모르겠으나 내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인구 100명중에 5명 정도가 풀마라톤 경험을 가진 것으로, 한국은 1명 정도이다.
그렇게 보면 희귀한 경우이기는 하다. 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다양한 기록과 깊이가 다른 내용들도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번 3월에 7번째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고 올해에만 4차례의 도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럴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뛰면 좋으니까’ 뛴다.
마라톤을 하는 데에 타고난 소질이라는 것이 있다. 무슨 운동이든지 같이 운동을 해 보면 서로가 다르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30%의 소질과 60% 훈련, 10% 기타요인에 의해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고집(?)을 가지고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있슴도 간과 할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습능력을 키우고 훈련을 거듭하고 공부하려들면 상당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교육학에 대한 깊이가 없어서 감히 덧붙일 수도 없지만 학습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익힌다.‘ 로 되어 있다. 훈련은 ’어떤 것을 익히기 위해서 되풀이 연습함’이다.
공부는 위의 두 가지를 결합한 형태에 자율적인 요소가 가미된 형태이다.
그래서 공부는 가장 바람직한 표현이자 일반적인 용어이다.
‘공부하라’ 평생 듣기 싫은 낱말 중에 하나다. 함에도 장성수라는 친구는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감히 책까지 내다 팔았다.
골프를 치다보면 실력들이 같을 수가 없다. 일란성 쌍둥이가 친다고 하더라도 놓여 진 공의 위치와 골퍼의 신장과 나이와 힘의 배분, 중력과 목표지점의 차이, 바람과 잔디, 클럽의 각도, 헤아리자면 108가지의 요인들이 다르다. 어렸을 때부터 골프를 시작할 수가 없어서 대부분 나이 먹고 사회에 나와서 그것도 여건(?)에 따라서 수만 가지의 동기에 의해서 시작을 한다.
배우는 속도도 천차만별이다. 그 속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말을 아낀다. 그게 골프의 매너라고 포장이 되기도 하고 실제가 그렇다. ‘감히 누굴 가르치려 들어 ?‘
세상살이도 그렇지만 한마디로 줄이면,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이다.
바둑에서도 ‘혼자바둑 3년이 스승바둑 6개월을 못 이긴다.‘는 말이 있지만 골프는 바둑과는 또 다르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금기시하기도 하거니와 아랫사람에게서 배운 윗사람은 아주 특별한(?) 분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에 따른 비화도 숱하다.
노무현이 그랬고, 문재인은 노무현 보다도 어쩌면 더 어려운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노무현의 속도를 문재인은 따라가지를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그 가능성에 기대를 갖게 한다. 노무현은 속도 때문에 ‘설화‘ 가 뒤 따랐지만 문재인는 그런 ’설화‘가 상대적으로 적다.
한 번의 대선으로 시시한 것은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첩첩산중이다. 한마디의 말을 수없이 확대재생산하는 언론들이 있고, 그걸 헤아려 걸러내지 못하는 국민들도 있고, 자기 진지에서도 정말로 호시탐탐하는 세력들이 언제고 할퀴려 은인자중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국민들로 부터는 야당이 박근혜의 실정을 쓸어 담지 못한다고 비난을 받고, 치고 나가려고 하면 자기 진영에서부터 벌떼처럼 갑론을박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한 가지 기대가 되고 희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고, 차마 눈뜨고 사는 세상이 아닌 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문재인, 그에게는 할 수 있는 패, 손에 쥔 패가 아예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손에 조그만 패를 하나 들었다. 다른 변수는 하나도 변하지가 않았다. 국민, 여당의 자충수, 그건 남의 패이고 그것까지 이용하려하기에는 너무 섣부르다.
다만 ‘깨어있는 시민‘들이 깨어나서 한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막 깨어나서 눈을 뜬 다음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를 몰라서 허둥대다가 헛발질로 자살골을 수도 없이 스스로 먹여야 했던 그들이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공부’ 한 효과가 조금씩 엿보인다는 것이다.
박정희 묘에 참배를 한다. 그 문제 하나로도 이미 적전은 사정없이 분열되고도 남았다. 이완구총리 청문회처리 문제에서도 호응은 아니래도 목소리를 낮추어주는 모습이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분명 많이 달라졌다. 실감한다. 문재인이 잘하고 있는 게 아니라 공부한 시민세력들이 이제야 뭔가를 아는 듯하다. '행동하는 양심'의 때를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다.
잘하는 것이다.
문재인의 조그만 선택들이 당위에 맞지 않는 부분이 분명하지만 감내까지 해주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벌써 봄을 맞을 준비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재인의 고민은 어쩌면 지금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조용함이 오히려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조용히 깃발을 내리고 있는 지금도 언제든지 함께할 그 날이 분명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조용하기만 한 ‘희망의 분수’를 마음속에서 뿜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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