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드레퓌스(Dreyfus)를 떠 올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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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대학 2학년때 배웠던 "정치사상사" 시간에 기말 고사 시험문제로 출제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당시 어떻게 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논하라"
다만 항상 진실의 문제가 눈앞에 닥쳤을 때 생각나는 "가치로운 사건" 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싱턴 한국일보 6 / 26일자 칼럼입니다.
다시, 드레퓨스(Dreyfus)를 떠 올려야 하는가
아주 평범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들이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마다 이제는 대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사소할 수도 있었고, 개인적일 수도, 그대로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이 민족의 운명과 역사를 바꿔버리는 엄청난 사건으로 커져버린다.
이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12년 동안 프랑스사회는 극단적으로 양분화되어 국력이 소진되고, 정치적 추문사건으로 기록되었지만 도덕과 윤리, 진실의 소중함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게 하는지를 세기를 달리해 가면서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프랑스 육군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소령인 에스테라지 라는 간첩이 쓴 문건으로 인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여기에서도 문자나 글자가 등장한다.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가 19세기말에 20여년간 보불전쟁을 치루고 프랑스가 패하자
그 패배의 명분을 찾던 중 수구적 민족주의에 편승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 간 것이다. 당시 군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던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 에스테라지를 적발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진범은 무죄로 풀려나고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된다.
그 때 증거자료를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 이었다. 그는 이런저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작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 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 편지를 기고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그 사건을 폭로한다. (에밀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한다.)
이 밖에도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대부분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 때문에 '드레퓌스를 죽여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하느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등의 수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 세계 언론과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었고,
그 후로도 지식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되었다.
드레퓨스가 재판을 받고 있는 동안의 프랑스에서는 진실을 말하려는 자들은 모두 다 분파주의자요, 간첩이요, 국기를 문란시키고, 적을 이롭게 하려는 반 애국자가 되어야만 했다. 단합해서 간첩하나 없애버리자는 데 무슨 이론이 있을 수가 있으며, 애국 언론과 정부를 믿지 못하는 그들은 정체를 밝히고, 프랑스를 떠나라고 했다.
일상의 어느 개인이 드레퓨스 사건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데,
언제든지, 누구든지 드레퓨스가 될 수도 있는 사회라면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2010. 6. 21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강창구
그때 당시 어떻게 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을 논하라"
다만 항상 진실의 문제가 눈앞에 닥쳤을 때 생각나는 "가치로운 사건" 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워싱턴 한국일보 6 / 26일자 칼럼입니다.
다시, 드레퓨스(Dreyfus)를 떠 올려야 하는가
아주 평범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들이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마다 이제는 대명사처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사소할 수도 있었고, 개인적일 수도, 그대로 묻혀 버릴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이 민족의 운명과 역사를 바꿔버리는 엄청난 사건으로 커져버린다.
이 사건의 재판이 진행되는 12년 동안 프랑스사회는 극단적으로 양분화되어 국력이 소진되고, 정치적 추문사건으로 기록되었지만 도덕과 윤리, 진실의 소중함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갖게 하는지를 세기를 달리해 가면서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프랑스 육군대위였던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소령인 에스테라지 라는 간첩이 쓴 문건으로 인하여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으로 유배당한다.
드레퓌스는 잘못된 증거 자료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실 드레퓌스는 무죄였다. 정보 유출에 사용된 문건에서 발견된 암호명 'D'. 이에 따라 유태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그 이름의 첫글자가 암호와 일치한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지목했다. 여기에서도 문자나 글자가 등장한다.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가 19세기말에 20여년간 보불전쟁을 치루고 프랑스가 패하자
그 패배의 명분을 찾던 중 수구적 민족주의에 편승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 간 것이다. 당시 군은 그들의 실수를 덮으려고 사실을 은폐했으며, 가톨릭교회와 보수주의 언론들도 드레퓌스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던 피카르 중령이 우연한 기회에 진짜 간첩 에스테라지를 적발하게 되었다.
그는 참모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진범은 무죄로 풀려나고 피카르는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된다.
그 때 증거자료를 몰래 복사해서 실어 낸 어느 한 신문에 의해 드레퓌스 사건이 세상에 공개된다. 하지만 가장 곤란한 상대는 진범인 에스테라지 본인 이었다. 그는 이런저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녔고, 놀랍게도 참모본부는 그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작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에 "나는 고발한다!" 라는 제목으로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유명한 공개 편지를 기고함으로써 일반 사회에 그 사건을 폭로한다. (에밀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 중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에 귀국한다.)
이 밖에도 여러 지식인과 신문사 르 피가로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대부분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 때문에 '드레퓌스를 죽여라'는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
유대인들은 간첩으로 몰리기까지 하자 테오도르 헤르츨을 중심으로 하느님이 약속했다는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겠다는 시오니즘운동을 시작한다.
에밀 졸라를 비롯하여 앙리 푸앵카레, 장 조레스 등등의 수많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프랑스 군부와 정부에 대한 비판, 세계 언론과 외교적인 부담이 가중되었고,
그 후로도 지식인들의 끈질긴 요구에 의해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에 드레퓌스의 무죄가 선고되어 모든 혐의를 벗고 복권되었다.
드레퓨스가 재판을 받고 있는 동안의 프랑스에서는 진실을 말하려는 자들은 모두 다 분파주의자요, 간첩이요, 국기를 문란시키고, 적을 이롭게 하려는 반 애국자가 되어야만 했다. 단합해서 간첩하나 없애버리자는 데 무슨 이론이 있을 수가 있으며, 애국 언론과 정부를 믿지 못하는 그들은 정체를 밝히고, 프랑스를 떠나라고 했다.
일상의 어느 개인이 드레퓨스 사건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그런데,
언제든지, 누구든지 드레퓨스가 될 수도 있는 사회라면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2010. 6. 21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강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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