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功)과 과(過)
페이지 정보
본문
공(功)과 과(過)
광복 70주년이란다.
‘공과 과’에 대한 이야기가 요즈음 부쩍 많아진듯하다. 민족사적 큰 일을 치루고 난 뒤에 70년, 그 뒷정리의 평가를 하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주로 뒤가 구린 선조를 둔 분들이나 거기에 빌붙어 연명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도둑이 제발 저린듯한 심정’으로 그러는 듯하다. 공(功)은 공로를 말하며, 과(過)는 허물을 말한다. 이를 구분하고 정리하는데에는 두가지의 준거틀이 있어줘야 할 듯하다.
‘역사’, 즉 시간적인 기준점이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서는 공도 과가 될 수가 있고, 과가 공으로로도 바뀔 수가 있다. 또한 ‘판단자‘, 누구의 시각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공과 과가 달라지게되는 것이다. 가령 사형수를 보는 사회적 기준과 사형수의 자식들간에는 평가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보다 객관화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추상적이지만 ’가치‘라는 개념을 가져와야만 그 구분을 좀 더 확연하게 해줄 수가 있을 것 같다. 평가 대상인 그가 공인이었을 경우에는 ’정통성‘, ’사회성‘, ’역사성‘ 같은 개념과 개인적으로는 ’도덕성‘ 같은 것이 그 분석의 틀에 필요할 것이다.
흔히 공과 과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거나, 어느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경제학에서는 ‘제로썸’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쉽게 평가해 버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우선 공과 과의 크기를 비교하기도 한다.
가령 하얀 백지위에 검은 점 하나가 있다면 깨끗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이미 ‘깨끗하지 못한 종이‘ (종이는 깨끗해야 하는데...?) 라는 지배관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도 검은 점은 점차 어느사이 괴물처럼 커지는 둔갑을 하게 된다.
바탕의 거의 전부가 아무리 하얀데도 그 흑점하나에만 시선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검은 종이 위에 있는 흰 점 하나는 거의 무시할 수준이 된다. 간단하게 아예 지워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온통 ‘검은색‘ 자체가 가치중심이 되게 만들어 버린다. 소위 말하는 ’가치전도‘를 의도하고 이루어 버린다.
이스라엘이 2,500년전의 자기 조상들 땅이라고 멀쩡하게 살고있는 팔레스타인들을 내 쫒고나서 난 뒤 ‘승자(?) 역사 70년’ 은 팔레스타인에게는 치욕과 능멸의 역사가 되어 있지만 거기에 가해지는 이중적인 가해와 국제사회의 냉담은 다중적인 고통을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숙명적으로 지워지고 있다.
세월호에 자식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거기에 가해지는 이중 삼중의 가해행위는 사회가 ‘검은 색 가치’로 변해있지 않으면 설명이 안된다. 위안부로 끌려가게 생긴 시국만 가지고도 분통이 터질 일인데 해방이 되고 나서도 조국의 정부가 가해 일본편에 서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립을 위해 가산을 팔고 타국땅에서 설움의 세월을 뒤로하고 돌아 온 조국에서 그 일본놈 앞잡이를 했던 사람들에게 또다시 고문을 당해야 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그리고 일본지배에서 벗어났는데도 또다시 어떤 멸시와 차별을 겪고 있는 지역이 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해방조국’은 상대적 박탈감의 연속선상에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과 조건이 어떤 ‘조건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렇게 만든 행위 당사자들에게 역사의 준엄함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당하다.
그것은 역사성에 준거했을 때 민족의 장래에 수많은 과오가 있음에도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고자 하는 황당한 가치전도가 자행되고, 그걸 방치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다시세워야 한다.
‘나쁜짓을 해야 성공하고, 힘센놈에게 붙어야 산다.‘는 것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인식되어졌다고 하면 실로 민족의 비극중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강조한다.
금주,금연,금욕에 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했으며 부하들에게 친절했던 히틀러의 공과도 다시 묻자고 할 것인가,
그렇게 본다면 공이없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괘변만 너절할 뿐이다.
그래서 다시 강조한다. 일본과 조금이라도 연관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심판받아 마땅한 70년인 것이다.
광복 70주년이란다.
‘공과 과’에 대한 이야기가 요즈음 부쩍 많아진듯하다. 민족사적 큰 일을 치루고 난 뒤에 70년, 그 뒷정리의 평가를 하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주로 뒤가 구린 선조를 둔 분들이나 거기에 빌붙어 연명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로 ‘도둑이 제발 저린듯한 심정’으로 그러는 듯하다. 공(功)은 공로를 말하며, 과(過)는 허물을 말한다. 이를 구분하고 정리하는데에는 두가지의 준거틀이 있어줘야 할 듯하다.
‘역사’, 즉 시간적인 기준점이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서는 공도 과가 될 수가 있고, 과가 공으로로도 바뀔 수가 있다. 또한 ‘판단자‘, 누구의 시각이냐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공과 과가 달라지게되는 것이다. 가령 사형수를 보는 사회적 기준과 사형수의 자식들간에는 평가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보다 객관화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추상적이지만 ’가치‘라는 개념을 가져와야만 그 구분을 좀 더 확연하게 해줄 수가 있을 것 같다. 평가 대상인 그가 공인이었을 경우에는 ’정통성‘, ’사회성‘, ’역사성‘ 같은 개념과 개인적으로는 ’도덕성‘ 같은 것이 그 분석의 틀에 필요할 것이다.
흔히 공과 과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거나, 어느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은 경제학에서는 ‘제로썸’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쉽게 평가해 버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우선 공과 과의 크기를 비교하기도 한다.
가령 하얀 백지위에 검은 점 하나가 있다면 깨끗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이미 ‘깨끗하지 못한 종이‘ (종이는 깨끗해야 하는데...?) 라는 지배관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도 검은 점은 점차 어느사이 괴물처럼 커지는 둔갑을 하게 된다.
바탕의 거의 전부가 아무리 하얀데도 그 흑점하나에만 시선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검은 종이 위에 있는 흰 점 하나는 거의 무시할 수준이 된다. 간단하게 아예 지워 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온통 ‘검은색‘ 자체가 가치중심이 되게 만들어 버린다. 소위 말하는 ’가치전도‘를 의도하고 이루어 버린다.
이스라엘이 2,500년전의 자기 조상들 땅이라고 멀쩡하게 살고있는 팔레스타인들을 내 쫒고나서 난 뒤 ‘승자(?) 역사 70년’ 은 팔레스타인에게는 치욕과 능멸의 역사가 되어 있지만 거기에 가해지는 이중적인 가해와 국제사회의 냉담은 다중적인 고통을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숙명적으로 지워지고 있다.
세월호에 자식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거기에 가해지는 이중 삼중의 가해행위는 사회가 ‘검은 색 가치’로 변해있지 않으면 설명이 안된다. 위안부로 끌려가게 생긴 시국만 가지고도 분통이 터질 일인데 해방이 되고 나서도 조국의 정부가 가해 일본편에 서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립을 위해 가산을 팔고 타국땅에서 설움의 세월을 뒤로하고 돌아 온 조국에서 그 일본놈 앞잡이를 했던 사람들에게 또다시 고문을 당해야 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면, 그리고 일본지배에서 벗어났는데도 또다시 어떤 멸시와 차별을 겪고 있는 지역이 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해방조국’은 상대적 박탈감의 연속선상에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과 조건이 어떤 ‘조건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렇게 만든 행위 당사자들에게 역사의 준엄함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당하다.
그것은 역사성에 준거했을 때 민족의 장래에 수많은 과오가 있음에도 그들을 죽음에서 부활시키고자 하는 황당한 가치전도가 자행되고, 그걸 방치하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다시세워야 한다.
‘나쁜짓을 해야 성공하고, 힘센놈에게 붙어야 산다.‘는 것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인식되어졌다고 하면 실로 민족의 비극중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강조한다.
금주,금연,금욕에 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했으며 부하들에게 친절했던 히틀러의 공과도 다시 묻자고 할 것인가,
그렇게 본다면 공이없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괘변만 너절할 뿐이다.
그래서 다시 강조한다. 일본과 조금이라도 연관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심판받아 마땅한 70년인 것이다.
- 이전글국경일이 되면 부끄러운 사람들 15.08.20
- 다음글충성과 지조 15.08.0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