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그 깊이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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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사랑합니다.
한가위 잘 보내세요
배려, 그 깊이의 아름다움
물건을 샀다.
파는 쪽에서 물건을 팔고 이득을 봤으니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는 쪽에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에 대한 이해의 여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깊이가 다르다.
파는 쪽이 아닌 , 사는쪽에서 감사하다 할 이유가 산더미 같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그래야 하는 지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쪽도 더 많은 게 세상이다.
앞뒤 잴것도 따질 것도 없이 그리스도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다 .
한번 어깃장이 나기 시작하면 것잡을 수 없는 게 사람의 감정이자 외교의 단절이다.
철강왕으로 유명한 카아네기가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의 편에서 분노의 대상과 구체적인 분노의 실체를 파악해 들어가다 보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게 대부분이고,
분노의 원인을 찾아가는 동안에 분노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면서 절대 침착을 강조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 분노했을 때에 얼마나 빨리 `냉정`으로 되돌아 오는가 하는 `시간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를 구분한다고까지 역설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우리가 혼자서 묵언 수행 한다면 모르지만 말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한다.
일대일의 대화와 속삭임도 있겠고, 일대 다중의 사람들이 서로간에 생각들을 교환하고 있다.
미국에 온 지가 8년이 지났는데도 영어에 익숙치 못한 것은 늦은 나이 문제도 없는 건 아니지만 많이 듣기보다는 일종의 일방적 말하기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으로 자가진단을 해 본다.
말 못한 귀신 붙은양 혼자서 일방적으로 내생각 만을 얘기 하니, `당신은 내 말을 들으시오.`
얼마나 황당할 일일까만 이런 사람과 이런 사회현상들, 국제관계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우선 나부터,
서로가 만족스런 결과를 갖길 원하고 , 발전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지향코자했을 때 우리는 흔히 “죠해리 창(심리학자 Joseph Luft와 Harry Ingham) “ 을 대입해 보라는 권유를 받곤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담판의 현장에서도 협상의 여지는 두어야하고,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고 했던 육당선생처럼 세상에 믿을놈은 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공동생활과 인류번영을 위해서는 다면식 상호 인식의 폭은 넓을 수록 좋다.
멀리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데서 유래해서 자기성찰과 자가진단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 변화를 꾀해 봄직하다.
답답하게만 보이고, 미련한 몽니쟁이 같아보여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 친해질 수 있는 게 인간관계고, 외교이다.
이런 작은 개인간의 이해조정이나 신뢰관계의 고려와 연습이 조직간에, 또는 국가간에도 적용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상대방 탓으로 뭐든지 몰아부치는 것은 단기적 전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전략이나 정책으로는 부적절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죠해리의 `창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을 살펴보는 네가지 색션이 있다.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알고 있는 나(open), 나는 알고 있으나 상대방은 모르고 있는 나(close), 나는 모르고 있으나 상대방은 아는 나(hidden),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고 있는 나(blind) 이상의 네가지 색션중에서 어떤상황, 어떤상대냐에 따라 각기 색션의 크기를 달리해 가면서 연애도하고, 전쟁도 하는것이다.
여기에다 상대방의 변수 네가지까지 가미되었을 때에는 여간 복잡해 질 수가 있다.
베니스의 상인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협상가 옆에는 `내것도 네것, 네것도 네것`하는 식의
신앙적 신뢰에 바탕을 두고 “배려”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속 깊은 사람도 옆에 두는 것도 협상가의 필수요건이다.
왜 저렇지, 왜 저런 행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가의 고려없이는,
절대로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다.
죠해리의 창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이 더 한층 요구되는 게 요즈음의 남북관계이자 이명박정부이다.
2010. 07. 08
베데스다
무등세상
한가위 잘 보내세요
배려, 그 깊이의 아름다움
물건을 샀다.
파는 쪽에서 물건을 팔고 이득을 봤으니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는 쪽에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것에 대한 이해의 여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깊이가 다르다.
파는 쪽이 아닌 , 사는쪽에서 감사하다 할 이유가 산더미 같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그래야 하는 지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쪽도 더 많은 게 세상이다.
앞뒤 잴것도 따질 것도 없이 그리스도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다 .
한번 어깃장이 나기 시작하면 것잡을 수 없는 게 사람의 감정이자 외교의 단절이다.
철강왕으로 유명한 카아네기가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의 편에서 분노의 대상과 구체적인 분노의 실체를 파악해 들어가다 보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게 대부분이고,
분노의 원인을 찾아가는 동안에 분노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면서 절대 침착을 강조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 분노했을 때에 얼마나 빨리 `냉정`으로 되돌아 오는가 하는 `시간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를 구분한다고까지 역설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우리가 혼자서 묵언 수행 한다면 모르지만 말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한다.
일대일의 대화와 속삭임도 있겠고, 일대 다중의 사람들이 서로간에 생각들을 교환하고 있다.
미국에 온 지가 8년이 지났는데도 영어에 익숙치 못한 것은 늦은 나이 문제도 없는 건 아니지만 많이 듣기보다는 일종의 일방적 말하기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으로 자가진단을 해 본다.
말 못한 귀신 붙은양 혼자서 일방적으로 내생각 만을 얘기 하니, `당신은 내 말을 들으시오.`
얼마나 황당할 일일까만 이런 사람과 이런 사회현상들, 국제관계를 찾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우선 나부터,
서로가 만족스런 결과를 갖길 원하고 , 발전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지향코자했을 때 우리는 흔히 “죠해리 창(심리학자 Joseph Luft와 Harry Ingham) “ 을 대입해 보라는 권유를 받곤한다.
이해관계가 첨예한 담판의 현장에서도 협상의 여지는 두어야하고,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고 했던 육당선생처럼 세상에 믿을놈은 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공동생활과 인류번영을 위해서는 다면식 상호 인식의 폭은 넓을 수록 좋다.
멀리는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데서 유래해서 자기성찰과 자가진단을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 변화를 꾀해 봄직하다.
답답하게만 보이고, 미련한 몽니쟁이 같아보여도 언제 그랬었냐는 듯 친해질 수 있는 게 인간관계고, 외교이다.
이런 작은 개인간의 이해조정이나 신뢰관계의 고려와 연습이 조직간에, 또는 국가간에도 적용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상대방 탓으로 뭐든지 몰아부치는 것은 단기적 전술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전략이나 정책으로는 부적절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죠해리의 `창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을 살펴보는 네가지 색션이 있다.
나도 알고 상대방도 알고 있는 나(open), 나는 알고 있으나 상대방은 모르고 있는 나(close), 나는 모르고 있으나 상대방은 아는 나(hidden), 나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고 있는 나(blind) 이상의 네가지 색션중에서 어떤상황, 어떤상대냐에 따라 각기 색션의 크기를 달리해 가면서 연애도하고, 전쟁도 하는것이다.
여기에다 상대방의 변수 네가지까지 가미되었을 때에는 여간 복잡해 질 수가 있다.
베니스의 상인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협상가 옆에는 `내것도 네것, 네것도 네것`하는 식의
신앙적 신뢰에 바탕을 두고 “배려”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속 깊은 사람도 옆에 두는 것도 협상가의 필수요건이다.
왜 저렇지, 왜 저런 행동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가의 고려없이는,
절대로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다.
죠해리의 창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이 더 한층 요구되는 게 요즈음의 남북관계이자 이명박정부이다.
2010. 07. 08
베데스다
무등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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