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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의 삶 - 박의수 (본부 심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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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175회 작성일 08-07-3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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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겨레의 스승 1위에 선정된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서, EBS로부터 의뢰받아 박의수 선생님이 쓰신 내용으로, 도산의 정신이 아주 간략하면서도 함축된 내용으로 우리를 감동시켜주고 있다>


제목 : 삶 자체가 교훈이자 민족의 위대한 '텍스트' - 도산 안창호



글 박의수 (강남대 교수, 흥사단 심사회장)


도산이 서거한지 70년, 광복 후 우리 민족은 타고난 교육열을 바탕으로 세계가 놀랄만한 성장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거짓과 불신, 대립과 갈등이 선진국의 길목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국민이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고 겨레의 사표가 될 스승이 귀하다. 이에 교육으로 민족의 힘을 기르는데 앞장선 도산의 삶과 행적을 통하여 나라사랑과 참된 스승의 길을 되새겨 보기로 한다.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죽어도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도산은 망국의 일차적 원인이 거짓과 불신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자신부터 정직하기를 다짐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백성의 질고(疾苦)를 어여삐 여기거든 그대가 먼저 의사가 되라. 의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대의 병부터 고쳐서 건전한 사람이 되라.” 이것은 온 생애를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하여 살다간 영원한 겨레의 스승 안창호가 후세에 전하는 가르침이다.
도산이 서거한지 70년, 광복 후 우리 민족은 타고난 교육열을 바탕으로 세계가 놀랄만한 성장을 이룩하였지만, 여전히 거짓과 불신, 대립과 갈등이 선진국의 길목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국민이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고 겨레의 사표가 될 스승이 귀하다. 이에 도산의 삶과 행적을 통하여 나라사랑과 참된 스승의 길을 되새겨 보기로 한다.

삶을 지배한 위대한 각성

안창호는 1878년 평양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에서 태어나 14살까지는 가정과 서당에 서 유학을 공부하며 평범한 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17세 되던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시가지는 졸지에 전쟁터로 변하고 가옥이 불타고 고적들이 파괴되는가 하면 시민들은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이런 참상을 보는 소년 안창호의 마음속에는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청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우리 땅에서 싸운단 말인가?” “왜 우리는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분한 마음에 선배 필대은을 만나 토론하며 여러 날 고민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외국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 설쳐대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을 길러야 한다.”
‘힘’에 대한 각성은 마침내 ‘힘의 철학’과 ‘3대자본 축적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모든 크고 작은 일은 힘의 소산이며, ‘힘’의 중요한 요소는 지식과 경제력과 신용이다. 힘 있는 개인,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식의 자본, 금전의 자본, 신용의 자본을 저축해야 한다. 세 요소 중에서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하는 신용의 자본 즉, 인격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각성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다. “나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안창호는 즉시 서울로 올라가 구세학당(밀러학당)에서 약 2년 동안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관서지부의 책임을 맡고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1898년 7월 25일 대동강변 쾌재정에서의 명연설은 청년 도산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도산은 고향으로 돌아와 평양 강서에 점진학교를 세웠다(1899). 점진학교는 한국인이 세운 남녀공학을 하는 최초의 초등학교로 알려져 있다. ‘점진’이라는 학교의 이름에는 실력양성을 위한 도산의 방법론적 철학이 담겨있다. 점진은 단순히 급진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철저한 계획 아래 쉬지 말고 꾸준히 실천해나가자는 뜻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도산공화국”

1902년 9월 도산은 교육학을 공부하여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을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잡일꾼(houseboy)으로 일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길거리에서 조선인 두 사람이 서로 상투를 잡고 싸우는 것을 백인들이 둘러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국가의 수치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야만으로 보고 독립할 자격이 없는 민족으로 볼 것이다.” 도산은 교포들의 생활 개선과 일자리 주선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동포들이 거처하는 집 안팎을 쓸고, 유리창을 닦고, 커튼을 만들어 달고, 창틀과 문 앞에 화분을 놓고 꽃씨를 심었다. 인삼장수들은 서로 협정하여 구역을 공평하게 정하도록 했다. 약 1년이 지나자 동포들의 생활은 놀랄 만큼 달라졌고,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회관을 마련하고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한편 LA 교민 노동자들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리버사이드로 가서 캠프를 설립하여 일자리를 알선하는 한 편 회관을 마련하여 밤에는 교민들의 영어 학습 돕고, 나아가서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자체 보안을 위한 경찰까지 두게 되니 교포들은 이를 “도산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이때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교포들을 지도하며 “미국 농장에서 귤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도산의 가르침은 곧 현실적 과실로 나타났다. 농장주들로부터 신임을 얻은 동포들의 생활은 한결 윤택해 졌던 것이다.

신민회의 조직과 실력 양성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제가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도산은 서둘러 귀국하게 되었다. 1907년 초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곧 민족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종합적 민족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했다. 이어서 청년학우회, 대성학교, 태극서관, 마산동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하고, 「대한매일신보」ㆍ「황성신문」을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과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모든 활동은 일찍이 도산이 깨달은 바와 같이 교육, 언론, 실업, 인격훈련 등을 통하여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목표에 집중되었다.
특히 1908년에 세운 대성학교는 도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으로 시설과 교사진과 교육내용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모범이 될 만한 학교였다. 이를 본보기로 하여 전국에 유사한 학교가 많이 생겨나기를 바랐던 것이다.

거국가를 부르며 망명길에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빌미로 일제는 애국지사들을 일제히 검거하기 시작했다. 도산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으나 더 이상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거국가를 부르며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애국지사들이 청도에서 다시 만나 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했으나 지역감정과 불신이 원인이 되어 회담은 결렬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도산은 하얼빈, 남경 등지의 동포들을 둘러보고 1911년 봄 시베리아, 베를린, 런던, 뉴욕을 거쳐 북미대륙을 횡단하여 LA로 돌아왔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인국민회를 북미지방,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을 총괄하는 명실상부한 해외동포 대표기구로 만들었다. 나라 잃은 해외 동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며 때로는 외교적인 교섭까지 맡게 되었다.
한편 도산은 8도 대표를 발기인으로 하여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했다. “무실ㆍ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ㆍ체ㆍ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약 8년 동안 도산은 국민회와 흥사단을 기반으로 동포들을 조직화하고 실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상해에서의 통일운동

1919년 3ㆍ1운동 후 도산이 대한인국민회 특파원 자격으로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하니,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해와 서울에서 각각 임시정부 내각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도산은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런 분위기에서 취임할 수는 없었다.
도산은 5월 26일 연설에서 통합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단합하여야 합니다. 세계가 지금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머리가 되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러 왔습니다.”
6월 4일의 연설에서는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좋더라도 통일을 잃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 우리 스스로 통일을 방해한다면 아무리 자기가 국가를 위한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일본의 충신이 되고 맙니다.” 적 앞에서의 분열은 곧 이적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도산은 임시정부의 통합을 적극 추진할 것과 통합이 되면 다른 사람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전제로 6월 28일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미주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고, 독립운동 6대 방략을 발표하고, 국민 모두가 병역의무와 납세의무를 부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임시사료편찬회’ 설치, 「독립」신문 발행 등에 착수하는 한편,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도산 자신은 ‘노동국 총판’이라는 말직으로 내려앉았다. 이는 ‘대의’를 위하여 ‘소아’를 버리는 도산의 인품과 참된 애국의 길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한편 1920년 도산은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설치하고, 192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려는 청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했다.
도산은 마지막 순간까지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을 무렵,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계기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송태산장에 은거하던 중 동우회 사건으로 또다시 투옥되어 1938년 3월 그리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도산은 위대한 겨레의 스승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남아 있다. 도산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교훈이며 민족의 위대한 텍스트다. 다만 그 텍스트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이 무엇인가를 찾아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 후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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